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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집 엄마의 기록노트 입니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아직도 접지 못한 엄마의 수줍은 흔적들입니다.
시민운동을 직업으로 살아가는 맞벌이 부부의 이야기, 어설픈 습작의 흔적,
스무살 언저리에 쓴 몇편의 시, 1년간 장애인복지신문에 연재한 보육사일기까지...
아버지의 수술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연락이 왔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기까지 2시간여 동안 얼마나 울음을 참았는지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져나왔다.
고통을 참느라 이마에 식은땀이 방울 방울 맺힌 핏기없는 아버지는 "이제 괜찮다. 집에 가자"고 하셨다.
제대로 앉지도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아버지의 걱정은 병원비였다.
생전 병원이라곤 모르고 사신 분이었다.
우리는 그저 아버지가 강인하고 건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검사결과는 그동안 아버지가 숱한 통증을 참아왔음을 말해줬다.
간에 돌이 박혀있는데, 얼마나 많은 돌이 박혀있는지 돌을 제거할 수도 없다고 했다.
게다가 염증이 너무 심해 수술도 어렵다고 한다.
큰동생이 아버지를 들쳐업고, 둘째가 링거병을 높이 들고 함께 뛰고, 나는 미친 여자처럼 도로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택시를 잡았다.
좀 더 큰 종합병원으로 옮기는 동안 아버지는 "쓸데없는 짓 한다"시며 마구 역정을 내셨다.
우리 남매가 이렇게 합심하여 아버지를 거스르기는 처음이었다.
종합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또 다시 모든 검사가 반복되었다.
운좋게 4시간만에 병실을 배정받고나서야 엄마의 일터로 연락을 했다.
우리는 은연중에 엄마가 너무 놀라시지 않게 해야 한다는걸 다 같이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남동생 둘이 병원에서 함께 생활했고, 엄마는 계속 일을 나가셨다.
나도 일주일에 두 번 시외버스를 탔다.

수술하는 날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둘러싸고 서서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가 수술을 받으시는 5시간 동안 나는 "만약 아버지의 삶을 조금만 더 연장시켜 주신다면 나머지 내 삶을 당신께 드리겠다"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시간동안 우리 가족 모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흥정을 하고 있었을게다.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병실로 되돌아 오기까지의 일들이 마치 꿈결같이 아득하다.
두 남동생은 한달동안 모든 생활을 중단하고 병원에서 살았다.
동생들의 지극한 보살핌에 엄마가 오히려 소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한번은 엄마가 아버지의 얼굴을 닦아주다가 옆구리에 연결된 호수를 빠뜨리는 실수를 했다.
동생이 응겹결에 엄마의 손을 밀어내며 호수를 다시 끼워넣자 "내 영감인데 나는 손도 못대게 하고..." 하시며 섭섭해 하셨다.

이미 환갑을 넘기신 아버지의 수술로 인해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순간적으로나마 후회해본 것도 처음이었다.
집 한칸 없이 자식들 뒷바라지에 모든 걸 쏟아넣은 당신들은 막상 당신이 절박한 상황에 놓였을 때 쓸 돈은 계산에도 없었다.
정직하게 열심히 사신 대가치곤 어이없는 대접을 받는 분들.
그게 어디 내 부모에 한정될까마는 그런 걸 생각하면 정말 살 맛 안나는 세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보육사 한분이 자진해서 치료비에 보태라고 돈을 빌려주었고, 동생 친구 역시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었다.
다시금 치솟아오르려고 하던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어루만져준 따뜻한 가슴들은 결코 많이 가진 자들이 아닌 다같이 어려운 이들이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한달동안 나는 그동안 잊고 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혼, 돈, 우정, 가족에 대한 책임 등 나의 삶이 결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절감했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일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를 느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아버지의 삶은 오로지 우리들에게 전부를 투자한 삶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를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무어 그리 대단한 업적을 남겨서가 아니라 물질에 굴하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걸 우리에게 삶 자체로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실제로 남녀의 성차별이 없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성차별이 있었지만 그건 보통의 경우와는 반대였다.
우리 집에서 막내 여동생과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디 남자인 주제에 감히 여자한테..." 라는 말이다.
어려운 형편에 내가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이를 말리러 온 고모와 한동안 의절하시기까지 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자율성을 허락하셨는지를 서른이 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며 결과가 빤히 보이는 일에 고집스럽게 메달리는 애들을 지켜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때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한다.
용서하고, 기다리고, 믿는 것.
그건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큰 재산이다.

언젠가 아버지는 내게 그 일이 중요한 건 알지만 왜 꼭 내가 해야 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버지가 저를 이렇게 키우셨잖아요."
아버지는 그 말에 가슴을 치시며 울부짖으셨다.
"나는 그렇게 안키웠다. 그저 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활개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지."

 
(장애인복지신문 연재일 : 1997년 6월 27일/제3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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