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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는집소식'에는 해뜨는집의 소소한 일상과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해뜨는집이야기'는 1995년부터 월간 [함께하는 세상]에 연재한 글입니다.
'이야기장터'에서는 해뜨는집과 관련한 자유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합니다.
'기사모음'에는 여러 매체를 통해 비춰진 해뜨는집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여행스케치'는 해뜨는집 가족의 여행기록입니다.
1983년 우리 아빠는 30년 이상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오후 3시. 뙤약볕이 쏟아지는 부산 영도구 봉래 교차로.
85호 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위원의 목소리가 6개의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차벽 위에 서 있던 경찰도. 인근 아파트 주민도. 하늘 위의 구름도. 모두 숨을 죽였다.
시민들은 눈을 감았다. 고개를 숙였다. 시민 3천여명이 모여 앉았다.

“이 땅에 더 이상 정의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이 땅에 진실을 들어줄 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 더 이상 연대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먼 길 달려와 비와 최루액과 물대포를 맞아준 여러분이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가 절망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거라 했을 때 온 몸으로 기어오르는 담쟁이처럼 우리는 희망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여기까지 왔습니다.
전국에서 달려온 희망버스 여러분. 여러분이 계신데 제가 어떻게 포기하겠습니까.
신명나게 꿋꿋하게 보여줍시다.
여러분, 너무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2011년 7월 9일. 역사는 이날을 반드시 기억할 겁니다. 끝까지 함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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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우리 아빠가 30년이상 다니던 회사에서 정리해고를 당했다.
내가 대학3학년이었고, 바로 아래 남동생이 고등학생이었다.
엄마와 우리 5남매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빠는 퇴직금을 받아 시골로 가셨다.
소 한 마리를 사서 키우시며 혼자 생활하셨고,
엄마와 우리 5남매는 다락방이 딸린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가 무태 양계장에서 계란을 떼서 리어커에 싣고 장사를 시작했다.
순박하고 착하기만 한 우리 엄마는 부끄러워서 리어커를 끌고 거리에 나서는걸 너무 힘들어 하셨다.
처음 일주일간은 내가 엄마와 함께 리어커를 끌며 계란을 팔러 다녔다.
엄마는 말리셨지만, 결혼적령기에 들어선 딸아이가 리어커를 밀며 계란장사에 나선걸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매일 아침 리어커를 끌고 계란을 팔러 다니셨다.
주말이면 나는 산격동 골목시장에 계란 몇 판을 놓고 장사를 했다.
엄마는 리어커를 끌고 단골집을 다니면서 계란을 팔았다.
나는 씩씩했다.
교회 어른들이 시장판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어쩔줄 몰라 하셨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분들에게 계란을 팔았다.
절대 기죽으면 안되었고, 절대 당당해야만 했었다.

1984년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는 휴학을 했다.
동생은 1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해병대를 지원해서 입대했고, 나는 다시 복학해서 학교를 마쳤다. 휴학중에 나는 목욕탕 아르바이트를 했고, 또 입주가정부로 6개월을 지내기도 했다.
내 작은 급여는 우리 가족의 생계비로 쓰였다.

정리해고는 일터에서 성실한 일상을 유지하는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살인'이다.
한 가족의 생계를 빼앗아가고, 또는 가족의 이별을 가져오기도 한다.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좌절을 안겨준다.

엄마가 하던 계란 장사는 받을 수 없는 외상값만 남겨준 채 얼마 못가 끝을 맺었다.
엄마는 아빠가 계신 시골로 내려가셨고,
군에간 큰동생을 제외한 세명의 동생과 나는 다락방이 딸린 단칸방에서 계속 생활해야 했다.
복한한 4학년때 나는 제대로 학교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아있는 세명의 동생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으니까.

어느날 아침 우리집에 쌀이 떨어졌다.
군에 간 큰동생을 생각하며 둘째 남동생과 나는 "우리는 행복하다!"고 다시 읊조렸다.
진심으로... 하나님은 공평하신 거라고...
우리집에 부를 주시지 않는 대신 가족간의 화목과 사랑을 주셨으니 그게 더 소중하고 큰 거라고...
그렇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었다.
그즈음에 쓴 시 두 편...

 

 

이    름 :돌깡패
날    짜 :2011-07-10(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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